중세시대에 백작 가문 룩셈부르크가(家)는 지기스문트의 사망으로 혈통이 단절되기까지 하인리히 2세를 비롯하여 하인리히 7세, 카를 4세 등 4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였다. 또한 4명의 보헤미아 왕과 1명의 헝가리 왕이 이 가문에서 나오는 등 한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였다.

보헤미아왕 벤첼 2세가 15세기 초에 쌓은 것으로, 수용인원이 8천 명이 넘는다고 하는 벤첼의 성벽은 요새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전에 행정의 중심지였던 그랜드 두칼 궁전은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대리석 건물이다. 룩셈부르크의 옛 시가지와 요새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룩셈부르크는 그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스페인·프랑스·오스트리아·프로이센이 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중세 말기까지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400년 동안 20차례 이상 파괴와 재건축이 되풀이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그 결과 유럽에서 지브롤터에 이어 제2의 요새도시를 건설하게 되었으며 '북구의 지브롤터'라고 불리기도 한다.

룩셈부르크 곳곳에 있는 요새와 고성에는 열강 사이에 끼여 있는 소국의 항쟁과 고뇌에 찬 역사의 흔적이 잘 나타나 있다. 모젤강과 알제트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대도시가 갖추어야 할 충분조건 또한 만족하고 있으며, 절벽 위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가지의 경관은 관광도시로서도 손색이 없다.

 

'작은 성'이라는 뜻의 룩셈부르크는 게르만과 라틴 두 민족 사이에서 이들 두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돌담에 새겨져 있는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존하기를 원한다"라는 말은 그들의 특성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다. 오랜 외세 통치의 역사 속에서도 룩셈부르크의 40만 주민들은 꾸준히,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해 왔다.

룩셈부르크인 1명이 있을 때는 장미화원을 가꾸고, 2명이 모이면 커피를 마시고, 3명이 의기투합하면 악단을 구성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를 통해 룩셈부르크의 민족성을 엿볼 수 있다

 

룩셈부르크

 

 

아돌프다리

 

 

알제트 운하와 주변 풍경

 

 

그룬트의 복 포대와 알제트 운하

 

 

 

복 포대